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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淸州金氏는 新羅大輔公 金閼智의 후손이다.

 元來 淸州는 上古馬韓 땅으로서 백제시대에는 上黨縣(상당현)이라 하였고 娘臂城으로도 불렀다.西紀七世紀부터 신라의 영역이 확정됨에 따라 羅唐間(나당간)의 문물교류가 활발해지면서 韓字성을 수용해왔고 지방행정조직은 삼국통일 전후로 점차 정비되어 九州五小京制로 갖추어지면서 신문왕 5년(685)에 西原小京(淸州)에 金元泰를 처음으로 小京長官을 삼으며 그의 딸이 신라 33대 성덕왕의 왕비로 삼기도 하였다.그 후부터 청주김씨가 小京(淸州)에서 세거해 오다가 918년 왕건이 고려를 창건하여 성씨문화가 본관 종족 고착화되므로 김근겸 김언규 사촌간의 형제가 왕건의 개국공신으로 김근겸 수사도 삼중대광을 淸州君으로 封하고 김근겸과 김언규에게 벼슬을 하사하였다.

 淸州金氏는 中央과 淸州地方에서 호족과 귀족으로 활동했는데 元甫 긍률의 두 딸이 왕건의 첫째아들 혜종과 둘째아들 정종의 왕비로 삼았으며 광종(950)이 개혁정권으로 승계한다.

 김근겸의 7대손 김덕겸(1150)은 고려 상반기에 고승을 배출하고 불교문화가 활발할 때 法相宗승려로서 교단의 지도자가 되었다.

 특히 金芮宗과 金希一은 四寸間으로 市長에 해당되는 堂大等職을 지냈고 김예종과 김희일은 광종 13년(962) 창건한 국보 제41호 용두사 철당간의 鑄建(주건)을 맡아 고려의 代表的 거룩한 문화를 미래 우리 淸州金氏 후손 역사에 자랑스러운 선조로 전수하게 될 것이다.

 고려 중반기 약 100여년 동안 청주김씨는 격동기를 맞아 이자겸 난과 최충헌 난으로 호족과 귀족 출신을 무차별 처단하여 기록이 보전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김덕겸 묘지명 유물을 발굴 상계역사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었고 고려 중하기에 金甫는 攝校尉를 거쳐 金吾衛大將軍을 지냈으며 무신난 후로 淸州九峯山下 梧桐村에서 은둔 세거하시었다.

 金福基 仁秀 漢貴로 이어온 落南의 중시조 潾은 사촌동생 禧와 1360년 同進士에 나란히 합격한 자료가 발견되어 역사적 중요한 자료가 되었으며 潾字先祖任은 贊의 벼슬을 하였다는 증거가 700년전의 기록 자료가 나왔다.당시 정몽주 문익점과 같은 동년에 합격하였다.先祖 潾은 도종파 始生 김포파 乃生 동령파 又生 康津派 甫生으로 各各 全國으로 분산하며 세거하고 있으며 北宗派는 京仁과 釜山지역에서 많이 살고 있으나 일부만 연락이 되고 통일 이후 정확한 역사를 알 수 있을 것이다.

 朝鮮日時代 후손 中 김억추(1548∼1618)는 1597년 장흥부사로 역임 중 선조 임금으로부터 전라우수사 명을 받아 명량대첩에 혁혁한 공을 세우셔서 현무공 칭호와 정부에서 별묘를 하사하셨고 현무공 사우가 있는 금강사는 道文化財 제91호 지정 정부에서 관리하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북종파 김응주(1910∼2002)는 부산에서 3선 국회의원과 강진파 김재형(1918∼)은 대법관 도종파 김이수(1953∼)는 헌법재판소장을 역임하셨고 더불어 이북과 남한 전국 각 지역에서 분산 세거 명문의 가문으로 전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