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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보서문(舊譜序文)

 癸酉族譜序(西紀一九九三年)

 人間이 萬物의 靈長인 까닭은 氏族이 있고 派系와 昭穆의 序列을 明白히 가릴 줄 알기 때문이다.그 本源을 溯及하고 宗支系를 序列함은 千古에 亘하여 不易의 鐵則이라 生覺한다.

 어느 姓氏인들 悠久한 傳統이 없으리오마는 舊家乘譜를 살펴보면 우리 淸州金氏도 古代新羅國金氏王의 璿系로서 敬順王子諱錠께서 淸州에 封君되어 始祖가 되고 그 十世孫諱甫께서 麗朝末에 金吾衛大將軍이 되어 以功으로 淸州伯에 封되고 州之九峯山下梧洞村에서 居之하니 子姓이 淸州로 仍貫하였다.金吾衛公이 有三子하니 長曰藝요 次曰菉이요 季曰이시다.次子菉의 孫諱麟이 李朝에 入仕하여 太宗朝에 이르러 議政府都承旨를 거쳐 左贊成에 在職 때에 直諫타가 奸黨의 誣陷을 입어 長興都護府使로 出補되니 湖南族의 中始祖가 되었다하였다.

 이 先祖의 積德과 累仁의 蔭德을 입은 後孫이 幹固葉茂하고 文章道德과 忠孝節義者가 奕世連綿하여 至今에 湖南의 著姓으로 불리우니 醴泉이 有源하고 靈芝가 有根함이다.그 동안 先世들이 數次에 걸쳐 修譜하였으며 지난 戊午年 一九七八年에도 贊成功諱麟을 中始祖로 모시고 續修하여 後孫들을 收合하는데 苦心積誠하고 博考遠蒐하였으나 或은 漏譜者가 있고 或은 昭穆의 序列도 마지않아 周密치 못하고 또한 只今의 産業社會가 되면서 宗族들은 各其生計에 따라 鄕里를 떠나 全國各地方에 散居하고 兼하여 西歐文化가 流入되면서 民族精神文明이 平衡을 이루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固有의 美風良俗이 漸次日頹되어가고 鄕里庭訓에 未洽한 一部後世들이 或여 敬老孝親과 崇祖睦族의 道理를 忘却하는 事例가 생길까 憂慮됨으로 于先宗親을 收合함이 急先務라 生覺되어 이번 修譜를 늦추지 못하였다.그러므로 諸族과 合議하여 今年修譜를 編纂한 일은 吾門의 榮光이오 偉大한 事業이 아닐 수 없다.왜냐하면 앞에서 言及한 바와 같이 全國各地方에 散逸되어있는 宗親들이 收合되고 今世에 日頹되어가는 追遠報本의 精神을 一層倍加해주고 敦宗睦族의 情誼를 두텁게 하는데 原動力이 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한때 燦然하였든 우리 門族이 其間幾百年을 두고 沈滯狀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이번 修譜를 契機로 빛나는 先祖들의 遺德을 奉承追慕하고 올바른 敎子養孫을 이룩할 때 祖上의 冥助가 後孫 모두에게 고루 내려지고 宗中의 無窮한 繁榮과 적지 않은 結實을 맺으리라 確信하는 바이다.

 끝으로 修譜에 參與해주신 任員 여러분의 勞苦에 深甚한 謝意를 表하고 宗族 여러분의 聲援과 協助로 有終의 編纂을 거둔데 對하여 흐뭇하게 生覺하면서 鈍文이나마 序言에 가름하는 바이다.

서기1993년 8월 15일

淸州金氏大同譜編纂委員會委員長

淸州君 三十二世孫  鍾煥  謹識


 戊午族譜序(西紀一九七八年)

 夫譜之爲言은 所以收合宗族하고 而尊祖敦宗之謂也라 族之有譜는 猶國之有史하니 國而無史면 理亂褒貶을 靡所考徵이요 族而無譜면 宗支系序를 何以考正가 故로 國內士大夫家 - 莫不有譜하니 譜之於人家에 顧不重且大歟아 謹按淸州金氏는 遠有代序하니 新羅敬順王第六子諱錠이 以勳으로 封淸州侯故로 仍貫焉하다.厥後圭組簪纓과 淸顯名德이 奕世綿連하여 遂爲東方望族하다.諱麟이 始仕朝鮮에 以都承旨로 黜補長興退老하니 公寔南下中祖라 子姓이 仍奠居湖省列邑하야 椒聊가(椒聊는 山椒나무니 열매가 많음으로 子孫의 繁衍함을 말함이라) 蕃衍하고 連桂輝暎하니(生員進士의 小科에 또는 官吏登用의 大科에 合格한 분이 燦爛히 빛난다는 뜻) 考諸乘牒에 兵使億秋와 水使應秋와 府使百秋와 主簿成章과 副正大福諸公의 壬辰勳功과 水伯希敏과 判官振宗의 甲子之勳은(仁祖二年甲子에 있든 李适의 叛亂에 功臣이란 뜻(一六二四)) 名登盟府하고(李朝때 忠功을 管掌하는 忠勳府를 말함) 天褒炳하며(임금님의 表彰함이 빛난다는 뜻) 昌赫之篤厚風義와 梅菊軒應澄과 橘隱鳳采와 議麟采의 文學聞望은 民到于今에 欽誦不泯하니 諸公之流芳遺澤이 殆其遠矣라 金氏世譜는 實自議公始나 因世荒中止라가 至崇禎四庚寅하여 始克成編하고 其後二三次續修나 亦不能大同하고 而止於派譜者는 世故然也라 今玆修譜之役의 校讐也編輯也에 尸其事而始終賢勞者는 曰漢植貞鎔諸賢이라 闔宗이 同心協力에 不過年而告功云하니 淸州氏尊祖敦宗之風은 足以爲叔世之楷範이라 而其津津餘祿을 可量耶아 余於金氏에 多久要矣라 漢植貞鎔以斯聞이 七舍遠來하여 囑余以玄晏地役(玄晏은 晋나라 皇甫謐의 號니 이분은 高士逸士列女等의 傳記와 玄晏春秋의 著者로 傳記著述에 能한 분이니 따라서 여기에서는 族譜序文의 製述이란 뜻이다.) 甚勤하니 終未固辭하고 遂次如右하야 以歸之하노라.

龍集戊午穀雨節

晋州 鄭喆煥 謹序


 戊戌族譜序(西紀一九五八年)

 古人之爲後世慮也는 至矣라 周官之奠繫世와 (周官은 周公이 지은 周禮라는 冊名이요 奠繫世는 家系의 連結을 世上에 알린다는 뜻이니 至今의 族譜 制度와 같음) 漢之年表 (漢나라 때에 史上의 事件과 諸侯들의 家系 等을 年譜形成으로 記述한 表니 至今 族譜制度와 같음) 唐之氏族志는 (唐代에 있어서 氏族에 관하여 記錄한 冊이니 이 또한 至今의 族譜制度와 같음) 皆後世譜法所由本也라 然이나 在世道隆盛風俗淳尨之世하야는 有井田之制焉하야 (井田之制는 上古三代에 있는 土地制度니 四方一里의 田土를 井字로 九分하야 百姓八戶에 九分의 一式私有로 耕作收入케하고 그 중 한가운데 九分의 一은 八戶가 共同으로 耕作하여 所得을 國家에 바치게 하는 制度) 以類聚居로 有宗子之法焉하야 以統其族하니 此時는 雖無譜法이라도 可也나 至世道益降하야 而人類益繁則 - 其居日以散其族日以離矣니 不有譜乘以合而一之則 - 上不可知其祖先之所自來하고 下不可悉其子孫之所爲別하니 能知千派萬枝宗族之所以分乎아 故로 譜爲衰世作也니 吾於是有深感矣로다.余猶及見昔風俗未之日에는 宗族無遠近히 以時相往來하야 慶吊也.有事則 - 相扶持如手足也하며 有患難則 - 赴之猶恐其或後於人也하며 一人顯於時則 - 擧宗以爲榮하며 一人失於行則 - 闔門以爲恥러니 今皆不復如古昔矣라 然이나 獨以譜法之尙存也는 得以會千里之族하고 講百世之誼하야 不至相視如路人然이니 (相視如路人然은 서로 만나도 路中에서 만나 사람 같이 아주 모르는 사람처럼 지낸다는 뜻) 或以全譜하고 或以派修하여 要各隨其便宜爲之而己라 我今之有譜는 自議公麟采所輯始니 始欲合南北之族而成之나 勢有未能에 遂自贊成公之派族爲譜하야 歷庚寅甲戌凡三度編成矣러니 今距甲戌忽己八十餘年에 死喪生殖이 (죽어 없어지고 出生하여 불어난다는 뜻) 己紛乎하야 其不可勝計矣라 而加又世道人事之屢이 雖百歲不過也나 誠宜汲汲有事於是하여 而宗議屢發旋止라가 至往年丁酉에 議遂大定하야 湖西湖南諸郡之散居者가 無不協謀同事하야 規來仍舊而卷帙增廣하다.烏라 北族之不得與爲全譜는 固甚可憾이니 而是有世運阻之라 若乃南土而流落尾하야 不能無相失者固將有之矣則 - 是又安得無歎也리오 雖然이나 以今에 世道民俗之不古로 忘先遺親之徒 - 競爲邪說以亂之하니 而吾族能不爲流俗所沮하야 千里一室로 得以續先人故事면 庸非甚幸而可賀者歟아 刊旣畢에 衆以珍圭與聞是仕로 (與聞은 譜事에 干與하야 들어 알게 된다는 뜻) 屬爲一言키로 置卷端云이로다.

戊戌暮之下澣

贊成公十八代嗣孫 珍圭 謹書


 淸州金氏派譜序 康津 (西紀一九四○)

程夫子有言曰管攝天下人心收宗族厚風俗使人不忘本須是明譜系旨哉言乎盖譜系不明則人不知來處往往親未絶而不相識此有家有族者之所以汲汲於修譜者然也我金氏譜自前世而有數本曰戊辰也庚寅也乙亥也者是耳皆譜贊成公以下也伊後甲寅各家別自爲譜以會通而以去乙亥爲大譜之周甲也宗會頻仍門議屢回然竟未免中止者盖世代遠子姓繁衍而欲其引遠附疎廣收無遺則事務不勝其浩瀚簡不勝其重大故憂畏逡巡縮手相顧而已且恐或有南杜不許之弊習崇韜妄附之謬欲則俗其尙敦崇睦者反足爲召取笑矣然則大同合會譜豈不誠難乎哉於是宗議齊發上系則直依舊譜而下系則斷自節制公父子以下卽所謂康津派譜也竊惟我宗族雖有遠近親疎之不同而究其初則一人之身也譬如木雖千枝萬葉而尋其根則同也又如水雖千派萬流而溯其源則一也若徒知親親之殺而不知其始出於一人之身則其不至於喜不慶憂不吊而若越人之視秦瘠也者幾希矣嗚呼一人之身分而至於塗人致於忽忘可不懼哉此吾譜之所以作也雖然若但以修譜爲能事而不篤於親親義則所謂譜者奚足爲輕重也哉噫自鼻祖以後世德之淸白相承家法之忠孝相傳勳業之磊落相望與夫懿行偉節一開卷而然于前矣嗚呼休哉吾聞觀法近則取則易願我諸宗各自勉勵寶而鏡攷之益加羹墻之思則吾門其庶幾乎昔歐陽氏書其譜曰傳於其家者以忠事君以孝事親以廉爲吏而以學立身宋夫子序人譜亦引而寓勸戒曰凡士夫之承先裕後保族宜家者皆所當知也余於吾譜亦云爾哉

庚辰仲春

節制公十六代孫 基泰 謹序


 淸州金氏始修康津派譜記 (上仝)

維我金氏以東方之大姓爲淸州之望族久矣世傳譜牒累經兵金吾衛以上擧皆失傳世德年代終歸無徵之杞宋故惟我淸州爲貫者以高麗淸州侯諱甫爲中祖而始於戊辰中於庚寅兩度修譜矣其後四十餘年乙亥續譜之日先父老深恨先蹟之失傳廣覽麗之史旁搜諸金之譜溯考本支之舊牒遍採諸賢之文集自大輔公以至敬順二十八王及淸州君諱錠以下八九世之世代事蹟歷歷考出而昭載於卷首焉是知先蹟之顯晦固有關於時運之盛衰而抑亦有待於後裔之也耶苟非先父老之躬而血誠焉則其深源溯本安能若是之昭也實爲吾門聞疆之幸也嗚呼休哉淸州侯後孫有三派居于豊德及關北者長派也居于西者末派也爲中派而居于湖南者皆我落南祖贊成公之後裔也落南以後派又別焉曰長興也康津也前此修譜兩派必合上所謂戊辰也庚寅也乙亥也三本是耳就此而想見當時宗誼之和睦門議之一致世道之淑美矣豈不哉自是以後世代益遠子姓益多則收爲一譜實不易得故去甲寅使各家只得別自爲譜以俟夫會通之時而往在乙亥欲合長康爲大譜則人心世態日甚一日二十年前甲寅猶爲太古之太古矣是以譜議遂寢而族曾大父根錫氏自己卯春善力於中外收合節制公父子以下始修康津派譜星幾週甲而今將入矣竊念不以合譜爲事而惟派修之爲急者非欲其變舊例而立新規當此時明統系收宗族誠不容一日緩也欲其大同合譜則其麗不億者欲其無遺則事蔓事蔓者欲其晝一則論異之地恐或有不及事之爲慮故也盖是役也族大父相澈及根錫氏專任其責可謂獨賢勞矣噫乙亥舊譜以董狐之筆直書不諱實不違乎孔夫子秋陽之法門矣今譜雖依舊規遵行然而於嫡庶輕重之倫官職眞膺之節不能無微服過宋之意是則熟講乎子思子生乎今之世反古之道哉必逮夫身之訓者也後之繼而修譜者庶可以知我罪我莫非此譜之意推想以公之心也耶近聞長興亦爲派譜云異日合而爲全冊當易爲力矣余以無似在相役之後一無所輔而只誦張子各知來處而忠義立焉則有益朝廷之訓蘇氏推以至於一人之身則孝悌之心油然而生之說以夫同譜之宗黨云爾

歲庚辰地澤節上休

節制公十六代孫 基庸 謹識


 甲寅派譜序 長興(西紀一九一四年)

若稽古家世族久遠先系或有未完蓋在於大亂之後爲子孫無窮之恨見今大亂方與懲毖收族爲今日急務宜無此界而若淸州金氏之爲譜尤所當汲汲者何哉嗚呼文敎廢弛忠義掃地莫今日若不有以激勵扶植之則天理民或幾乎息矣第念淸州氏先德羅麗尙矣積慶累仁厥後克昌譜牒所載謂之東方文獻錄可也謂之東方忠義錄可也第言其則贊成公麟直黜冠山爲南來之祖寔此譜而奉學之之德行實啓家學而進士大畜早役於靜庵先生己卯同禍身否道亨扶植文敎者不可誣也主簿成章之殉義錦山水使希敏之振武錄勳兵使億秋三昆季之臨亂力副正大福之立僅鳴梁院正德福之宣武錄勳誠齋器元之丙子擧義縣監振海之戊申靖難九原可作當廓掃妖氣而旣不可得則其毅烈之昭如日星者足可以激發今人之忠義而彼販君賣國者亦可以聞風愧死矣譜雖金氏一家之私而實大東思復之一大消息向所謂尤所汲汲者然乎未耶金氏舊有全譜廣收同貫而族大以昌散處南北竊謂世遠天分也居遠之分也天地之分人不得不分亦理勢之所必至也橘隱鳳采議麟采皆以經術推重盖嘗經紀而未果斯文潤珍慨然於是跋涉千里勸成北族之譜而今年甲寅與宗人瑛淳奎錫派修于南族必以贊成公爲分派之祖者盖南來初祖雖百世不可分也吾聞譜中諸君子皆琢磨雪不擧世風俱贊成公剛直之氣閱數十世而猶有不斬者矣若所勉於金氏則潤珍氏所謂砥礪名行克承詩禮不迷於腥則雖衰猶盛也罔或見利忘義得罪名敎我祖先云者盡矣吾何贅焉譜將竣金氏秀士基權仁洙珍圭過余命之以相役潤珍氏又有書申焉

崇禎後五周甲寅四月晦

幸州 奇宇萬 謹書


 乙亥族譜序 (西紀一八七五年)

論海東氏族之盛에 必先數金姓은 皆自新羅王出하야 而支分派別에 各有封貫하니 淸州는 卽其一世라 盖敬順王이 娶高麗樂浪公主하야 生八하시니 其第六 諱錠은 封淸州하니 爲鼻祖라 自是以後로 簪纓相承하야 入本朝하야 有諱麟이 以都承旨로 黜補長興退老에 (黜補長興은 官職이 降等되어 長興으로 補職되었다는 뜻) 其子孫이 仍爲湖南土著하니 至今數十世에 蕃衍爀이 雖遜於諸金이나 而兵使億秋와 水使應秋와 府使百秋와 主簿成章과 副正大福의 壬辰之功과 水伯希敏과 都事振宗의 甲子之勳은 明登盟府하야 天褒炳하고 同樞昌赫之風義篤厚와 梅菊軒應澄과 橘隱鳳采와 議麟采之文學聞望은 爲人艶稱하니 此可驗德厚而流光이라 而世之尙論者亦豈或可少也哉아 金氏舊有譜는 以其世代寢遠으로 難於會通하야 今爲重刊爲譜에 使其宗人錫으로 問序於余曰 - 吾族僻在遐나 而門路淵源이 皆出於文正先生脚下하니 (여기 文正先生은 尤庵宋時烈이다.) 子一言弁之아하거늘 顧不無足承堪이나 而千里重繭을 (千里길 오면서 발이 부르텄다는 말) 亦不忍恝하야 遂略書此以歸之하니 若其收宗族厚風俗之義와 立忠義尊 朝廷地道는 修此譜者其必熟講乎程張之訓이러니 (程張之訓은 明道程先生과 橫渠張先生의 가르침이란 뜻) 玆不復架疊云爾로다.

崇禎五甲戌崇政大夫議政府左贊兼判義禁府事

弘文提學 德殷 宋近洙序


 庚寅族譜序 (一八三○年)

我東氏族은 金爲最盛而系出鷄林金者니 乃國中之甲族也라 盖自新羅敬順王及上洛伯以來로 派分而分封하야 仍各爲本者殆近百家하니 淸州金氏는 卽其一也라 麗末에 有金吾衛大將軍諱甫는 以勳封으로 封淸州侯하야 仍貫淸州하고 而居于州之九峰山下러니 其後裔散處三南及西北하다.曾孫諱麟이 入我朝에 爲左贊成하야 好直諫타가 遭讒出補長興하야 (好直諫 遭讒은 임금께 直言을 좋아하다가 奸臣들의 讒訴를 받았다는 뜻) 仍居焉하니 寔湖南族之中祖也라 子孫遍于長,康,靈,海,綾,羅,興,谷諸邑하니 苟非祖先積先種德이면 後昆之盛大豈如是哉아 文武簪纓亦且聯하야 而兵使億秋三昆季는 在壬辰之亂에 效力立功하니 兵使公은 贈兵曹判書하야 與忠武李公으로 享於錦江祠하야 若其孝烈之蒙褒旌과 文學之見推重이 代有相承하니 數湖南名族者 - 皆以金氏稱하며 而凡有斯文之事에 金氏鮮不與焉하다 於不休哉아 自新羅로 至于今千餘載에 屢經兵하야 世德無以考하고 年代莫能詳하니 金吾公以上은 擧皆失傳하여 後屬散居者 - 漸至疎遠하야 與路人無異焉則 (서로 만나도 同族임을 물으고 마치 길가는 行客을 對한다는 뜻) 金氏諸宗이 是爲之懼하야 而金吾公幾世孫議麟采는 懷慨然하고 其從官在京也에 遍告于八路 (우리나라의 八道라는 뜻) 諸宗하야 謀爲合譜하야 欲修尊祖收族之道則 - 僉議歸一하야 事幾就成이러니 適値己巳大侵하야 未免中撤하다.今也에 湖南族이 思如議公之志로되 而勢固有猝難得者故로 遂先成派譜하야 以待後日하며 若歐陽公成九刪集之說 (九刪集之說은 아홉번 刪除하여 要目만을 簡略하게 編集하는 것) 而簡其編帙하야 以便考覽하니 其追先敦宗之意至深切矣라 蘇氏所謂推以至於一人之身則 - 孝悌之心이 油然而生張子所謂各知來處而忠義立焉則 - 有益朝廷者其在斯歟 저 其將印也에 議公之胤世原이 繼述先志하야 (先父祖의 遺志를 이어받아 더욱 일으킨다는 뜻) 校踵成하고 (校正하여 先祖의 하신 일을 조차 完成한다는 뜻) 以契誼之으로 來問序於余하니 辭以病且無文而不獲하야 略綴數行하야 以謝其遠來之勤意云爾로다.

崇禎四辛卯九月  日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 成均館祭酒 侍講院贊善

恩津   宋穉圭   序